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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 언니, 쎈 여자...' - 정지월

기사승인 2019.09.09  10: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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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TV를 보다 보면 미국엔 없는 특이한 게 하나 있다. 그건 장면마다 밑에 자막이 달리는 건데, 처음엔 거슬리더니 요즘엔 그거 읽으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치 영상의 부족함을 채우거나 웃음포인트를 일러주는 듯한 디렉터의 가이드라고 할까? 참 세상 어디에도 없는 친절한(?) 배려다 . 

그 덕에 음향 없어도 내용을 이해함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오지랖이 넘쳐 내 자유로운 관람과 판단을 방해하기도 한다. 내 느낌이 아닌 PD나 예능작가의 의도를 강요받게 된다. 그럼으로 서서히 바보상자를 보는 더 큰 바보가 된다. 뭘 그렇게 과장하냐고...?

 

  셀폰이 나온 후 우리는 몇개의 전화번호을 외우고 사나...? 나는 내 것과 남편 것, 오피스만 기억하고 내 아이들 것도 완전히는 못외운다. 노래방이 나온 후 우리는 노래가사를 외울 필요가 없다. 하도 들어 저절로 외워진 것 외엔 일부러 외울 필요도 없다. 수학시험에 계산기를 쓸 수 있는 미국 아이들이 계산대에서 얼마나 버벅거리는지 겪어본 사람은 안다. 

 

   
정지월 전북포스트 애틀랜타 편집위원

  각설하고 이 자막들을 보다 보면 유난히 내게 거슬리는 단어가 있다. 바로 몇몇 여자 연예인이 출연할 때 붙는 수식어 '쎈 언니, 쎈 여자' 라는 보조 자막이다.  주로 평소에 자기 주장이나 개성이 강한 여자, 외모 치장이 남다른 여자들에게 붙여준다. 

제시(가무잡잡한 외모와 걸걸한 목소리), 최화정(평소 자기 취향이 확실하고 조곤조곤 말을 잘한다), 김숙(부리부리한 눈에 목소리가 크다), 이지혜(애교 있고 여성스런 이미지이나 결정적으로 싸움 전적이 있다). 

그 외에도 많겠으나 이쯤하자. 왜 '쎈 오빠, 쎈 남자'는 없는데 '쎈 언니 쎈 여자'는 그리 쉽고 많은지 묻고 싶다. 아마 그것은 쎄다는 게 남자에겐 칭찬이지 흉이 아니라는 범세계적인 인식 때문일 거다. 그럼 약한 남자가 남자에겐 가장 심한 욕이 되려나...?
 

  내게 보호본능의 '화수분' 같은 이미지의 친구가 있었다. 남자들이 많은 과에 다녔는데, 얘가 들어오고 동기, 선후배들은 물론이고, 다른 과의 남학생들까지 단과대학 하나가 들썩였다는 전설을 보유한 막강녀다. 도통 여자들에겐 보이지 않는 마력이 어디에 있기에 그토록 인기가 많은 건지... 

때는 바야흐로 1983년 여름방학이었다. 오랫만에 그 친구랑 약속을 하고 커피숍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아직 아쉬워 거리를 걸으며 이야기를 하다 그녀의 한 선배를 마주치니 화들짝 반가워하며 커피를 사주겠단다. 

거기에서 난 그녀의 비법을 목도하게 된다. 앞의 남자는 푹 넘어가 해롱해롱 하는데 난 눈뜨고는 못 볼 지경이어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뚱하니 앉아 있었다. 뭐를 물어보면 반작용으로 평소보다도 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남자 왈 “**는 시집가면 잘 살텐데, 저 친구는 좀 늦으면 시집가기 힘들겠네...“ 말인즉슨 나는 나긋나긋하지 않다는 말이렸다...?


  그런 내가 하늘의 도움으로 결혼이란 걸 하게 돼 결혼 준비를 위해 친정엄마와 서울에 왔다가 막차를 타고 전주에 내려가야 하는데 막차표는 벌써 매진이고, 앞차를 타고 간사람들의 자리가 나면 온 순서대로 탈 수 있다길래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어디서 끊길지, 이거 못타면 꼼짝없이 일박해야하는 상황에 뒤에 있던 어떤 남자가 일행인 여자손목을 끌고 새치기를 한다. 

뒤에서부터 제치고 나를 통과하려는 순간 “아저씨, 여기 서있는 사람들 안보이세요?” 하니” 어디서 어린 놈의 여자가...?” 하며 나를 때리려 하는데 우리 엄마와 일행인 여자만 빼고, 자기 순서를 뺏긴 남자들조차 한사람도 나서 말리지 않는다. 

보다 못한 매표원 아저씨가 “뒤로 가세요” 해서 몇 줄 뒤로 갔지만 그래도 끝까지 새치기로 같은 버스에 올라 타, 먼저 탄 내게 끝까지 위협과 자랑의 눈빛을 발사했다.


 내가 이야기를 장황하게 쓴 건,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한국 남자의 대부분이 “지월씨는 너무 쎄!” 하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불의의 시간에 내 정당한 몫을 지키기 위해 한마디 했을 뿐인데 내가 세다고...?

내가 쎈 게 아니고 자기 자리도 못지키고, 사람이 부당하게 맞을 뻔해도 말리지도 못하던 니들이 찌질한 건 아니고...? 그 때 난 새치기를 하던 그 인간 보다 지밥그릇을 뺏겨도 부당한 폭력의 순간에도 침묵하던 그 인간들이 더 미웠고, “그래, 니들은 평생 그렇게 당하며 살아도 싸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쩌다 내가 센 여자가 된 건지 아직도 알지 못한 채 쎈 여자 콤플렉스에 걸려 '쎈 언니, 쎈 여자' 프레임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병증을 앓고 있다.

 

  현실 감각 있고 현명한 우리 엄마는 고집 센 아빠를 이기지 못해 전 재산을 다 날렸고 지금도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내가 그때 적극적으로 말리고 싸웠어야 했다” 고...

쎈 여자인 나는 나보다 더 쎈 남자를 만나 아직도 투닥거리며 살고 있다. 남편은 가끔 말한다. ”너도 왠만한 남자 만났으면 목청 높이고 살았을 텐데 날 만나서...” 뒷말은 생략하겠다. 

오빠와 싸우며 큰 내 딸도 쎈 여자의 반열에 들어선 듯 한데 난 이 아이가 아주 마음에 든다. 자기가 원하는 건 자기 손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쟁취하고, 남자에게 뭘 바라지 않고 또 할 말은 하고야 마는...

남편과 내 아이들은 의외로 물렁한 내게 말한다. “난 니가 더 쎘으면 좋겠다고, 아무도 너를 타고 오르지 못하게 하라” 고...

나도 내가 더 쎘으면 좋겠다. 혼자 밥도 먹고 여행도 다니고 누가 나를 무시하면 쫄지 않고 앞에서 그러지 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내 정치적 색깔이나 신앙의 깊이도 눈치 안보고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그 마녀사냥 같은 쎈 여자 프레임에 코웃음을 칠만큼...
 

  나는 아마 쎈 여자일거다. 민주적인 아빠와 젤 맏이인 덕에 할 말은 하고 컸고, 남녀공학이었던 초등학교 때는 웬만한 남자들은 따라오지 못할 만큼 공부도 잘했었으니 내게 남자 선민의식은 눈꼽만큼도 없다. 내겐 멋진 남자 멋진 여자, 찌질한 남자 찌질한 여자의 카테고리만 있을 뿐이다.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의 정의조차 필요없다. 남자든 여자든 그런 상투적이고 진부한 개념에 갇혀 자신을 묶고 살 필요가 없다. 태어난 대로 생긴대로 살며 그저 나은 인간이 되고자 노력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태어나면서 정해지는 성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자신의 역할만 하면 되는, 그리고 그 노력으로만 평가 받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사족으로, 아직도 남자다운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남자다운 남자임을 자랑하는 이들이 정말 같이 살기에는 재미 없는 족속인 것을 아느냐고...? 그들은 독재적이고 심한 나르시스트에 여자와의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아직도 청순가련형에 보호 본능을 불러 일으키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에게 묻고 싶다. 평생 뒷수발하며 살 자신이 있느냐고...? 청순이 늙으면 청승되는 것도 아느냐고...? 

쎈 언니의 찌질한 복수성 멘트였다. / 정지월 편집위원

Jiworl Seok 편집위원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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