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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혼불의메아리]대상과 수상소감: 고은별의 ‘당신의 존재를 믿겠다는 약속’

기사승인 2023.05.27  15: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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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261편 접수 35명 시상

   
 

글제목: 당신의 존재를 믿겠다는 약속: 「검푸른 고래 요나」를 읽고

글쓴이: 고은별(30·서울시)

○ 들어가며

집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하천을 건너야 한다. 차들이 빠르게 지나치는 교량 위 좁은 폭으로 마련된 인도를 촘촘히 걸으며 정수리로 내려앉는 노을의 열기를 느끼는 일은 내게 친밀한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어느 날 귀갓길, 도량의 중간 지점을 지날 무렵부터 색소폰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앰프를 연결했는지 색소폰 소리는 쉴 새 없이 지나는 자동차의 소음을 거뜬히 뚫고 있었다. 90년대 히트곡들이 색소폰의 중후하면서도 애틋한 음색으로 울려 퍼지자, 교량을 걷던 중년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음악을 감상했다. 그중에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교량 아래를 기웃대는 이들도 있었다. 마침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나오고 있었으므로, 올해 서른을 맞은 나는 담담함과 청승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기분으로 교량을 지나왔다.

그러고 며칠 후, 교량 아래 작은 공원에서 산책하는데 또다시 색소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매우 가까이서 들리고 있었다. 수풀 틈이었다. 작열하는 햇빛의 덕분으로 나는 평소라면 안 보였을 수풀 사이사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산책로를 느리게 걷는 척 수풀 틈새를 건너다보았다. 색소폰 소리가 커지자 바스락, 떨린 나뭇잎이 내게 숨은 인영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연주자는 수풀과 나무가 만들어 낸 그림자 아래서 색소폰만 빼꼼 내민 채였다. 색소폰 소리가 풍부하고 선곡이 대중적이어서 모습을 드러냈다면 버스킹처럼 여러 사람이 모여들기도 했을 텐데, 연주자는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는 듯했다. 나는 그 의도에 화답하듯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이문세의 노래를 뒤로하고 산책을 이어 나갔다.

교량으로는 하루에 두 번, 목적지가 장례식장이 화환 배달 차량이 지나간다. 내가 사는 아파트 복도 끝에서 내려다보면 짐칸의 열린 천막 틈새로 화환의 꽃잎이 종종 떨어지는 장면도 볼 수 있다. 그날의 두 번째 화환 배달 트럭이 교량을 지나던 저녁에도 색소폰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피곤한 하루를 보낸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교량을 건너는 꽃잎들과 오로지 누군가에게 들려지기를 바라며 울리는 음악 사이를 걸었다. 싸늘한 날씨였고, 내 손에 들린 스마트폰에는 거의 다 읽은 「검푸른 고래 요나」의 전자책 버전이 켜져 있었다. 죽음과 애도, 어떤 이의 귀갓길을 위무하는 선율, 하루의 피곤을 담담히 지고서 그사이를 걷는 사람들. 소설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흐린 와중에도 해는 희끄무레한 빛을 뿜으며 서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 모든 것이 내 손바닥 속 소설과 한데 뒤얽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발밑으로 흐르는 물이 그 아래서 살아갈 혜미, 구름이, 할아버지, 율리아 할머니의 아들을 불러냈다. 하천은 한강으로 이어지니까, 강 아래에도 강 밑의 강이 있을까? 사막처럼 넓게 펼쳐진, 죽은 영혼들이 고래의 인도를 받아 다시 산다는 세계…. 내 발은 지극히 현실에 맞닿아 있었지만 심해 어딘가 사막처럼 펼쳐져 있다는 그 그리운 세계 또한 내가 딛고 선 땅이라는 인식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 대상 수상자 고은별 씨

○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그래서 믿는 이들끼리 손을 맞잡게 되는

내가 길을 걷다가 그러한 환상적 감상에 젖게 된 일은 나 자신이 특별히 감성적이어서라기보다도, 「검푸른 고래 요나」가 보여준 이야기적 특성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인 주미와 요나를 통해 보여주는 두 이질적 세계의 조화가 나를 현실과 환상의 교차점으로 이끈 것이다. 주미와 요나는 나이와 감수성, 함께 있는 풍경을 떠올릴 때의 조화로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세계관에서 함께 등장하기에 영 어색한 인물들이다. 주미가 한국기원 연구생을 거쳐 성공한 K-POP 아이돌이라는 이력을 지닌 재능 면에서의 ‘사기캐’라면, 요나는 출생부터 성장, 존재 방식까지 이성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환상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사기캐’라 할 수 있다. 보통의 ‘장르’ 소설들이 하나의 공고한 세계관을 정립하고 그 세계관 내에서 합리성을 지닌 인물들을 만들어내는 데 공을 들이지만, 「검푸른 고래 요나」는 그런 쓰기 관습으로부터 철저히 벗어난 서술 방식을 택한다. 주미의 아빠, 고모, 그리고 어린 시절 주미로 대표되는 이성적, 합리적, 과학적 세계, 즉 어린 주미가 지향하던 “뭐든 다르게 보고 비판”하는 태도가 미덕인 세계와 보름달을 신호 삼아 고래로 변하고 흰고래의 묵계로 살아가는 요나의 신화적 세계는 그 중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만나 하나의 생생한 시공간을 구성한다. 이런 만남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치밀한 설명이나 설정의 도입을 대신하여 작품이 집중하는 부분은 두 청소년 간의 애틋한 감정 교류를 묘사하는 장면이다. 마치 불화하는 두 세계를 잇는 실마리는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사랑과 이해에 있음을 증명하려는 듯 주미는 요나의 존재와 배경에 의문을 품지 않고 요나 또한 주미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그저 같은 음악을 듣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수리부엉이를 통해 마음을 전달하는 것으로 모든 게 충분하다는 듯 그들은 서서히 스며든다.

이들을 이어주는 각별한 요소들은 음악과 주변의 과도한 관심, 복잡한 과거, 그리고 남에게 쉽게 말하지 못할 비밀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건의 일부 국면이 미디어를 통해 어느 정도 전해졌으리라 유추할 수 있는 주미와 달리, 요나의 비밀은 그 자체로 한 세계의 공고한 믿음과 합리성을 깨부수는 종류의 것이다. 그런데 주미는 요나의 비밀 앞에서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가까워지고 싶은 만큼 비밀이 무엇이지 궁금해하지만, 결코 요나에게 꼬치꼬치 따져 묻거나 함부로 유추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주미의 과거가 요나의 존재와 호응한다. 과거 뛰어나다는 이유로,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선택할 수 없는 부모의 배경을 이유로 너무 많은 해명을 요구받으며 고통을 겪었던 주미였기에 한 사람에게 있어 비밀과 진실, 고백은 한 세상만큼 클 수 있다는 점을 주미는 이해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혜미의 죽음과 그로 인한 죄책감은 주미에게 있어 타인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바라봐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계기였을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데다가 주목을 독차지하는 언니임에도 미워하는 대신 “언니만 생각”한다고 고백할 용기가 있었던 혜미의 큰 세계를 자신이 이해해 주지도, 이해할 노력도 보이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주미의 절규는 애잔하지만, 그 깨달음은 곧 다른 이를 구원하는 실마리가 된다. 요나가 비밀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신비한 일들이 일어나고 마침내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주미의 주된 고민은 그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요나와 자신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렇게 신중한 태도로 접근한 끝에 마침내 주미는 요나의 비밀이 자신들의 관계에 영향을 끼칠 사안이라는 인식을 넘어서, 요나의 가족과 요나에게 있어 삶과 존재가 달린 문제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주미가 요나의 집으로 찾아가 고래가 된 요나를 보고 다음 날 고래 요나를 만날 생각으로 설레고, 요나의 “집안 사정을 공유해야 하는 가족”이 된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혜미의 상실로 인한 깨달음은 주미로 하여금 요나를 구원하게 하고, 요나는 한때 차가운 바닷물 속의 혜미를 인도하여 구원한 바 있다. 돌고 도는 구원, 그 바탕에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에서 자신을 설명하느라 “말을 끊고 침묵”하는 틈, “말을 고르는 머뭇거림”을 알아볼 수 있는 주미의 섬세한 마음이 자리한다. 그리고 그 마음은 주미가 깊은 고통을 견디고 통과하는 중에 성장한 것이다.

깊은 아픔을 겪은 이들이 서로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와 비밀을 털어놓고 이해하고 가족이 되는 장면은, 비록 소설이 환상의 요소들을 취하고 있다고 해도 현실의 수많은 연대를 떠오르게 만든다. 5.18 유가족들이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하고, 세월호 유가족들이 10.29 참사 유족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일들, 성폭력 피해자가 다른 피해자의 재판을 꼬박꼬박 참석하는 일들, 산재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다른 산재 피해자들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는 일들…. 그 손들이 맞잡는 일이야말로 고통을 통과하며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만 같은 이야기들, 그러나 믿어주는 사람과는 단숨에 가족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들. 어떤 이들에게만 들리는 고래의 노래처럼,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쉽게 부정당하고 그 진실성을 의심받는다. 그러나 믿고 믿지 않고의 절대적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의 진실이란 것이 정말 교수와 군인과 국가 기관에만 있는 것일까? 헌책방의 낡은 책과 흑산도에서 구전되는 사연, 고래 아내를 기다리는 노인의 눈동자 속에서 진실이 발견될 수는 없을까? 소설은 질문하는 듯하다. 그래서 「검푸른 고래 요나」의 환상성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 날카로운 현실적 환상은 마침내 과학적 세계야말로 음모와 모의 작당이 가득하며, 신화적 세계에는 진실과 구원이 있다며 기존의 믿음을 전복시킨다.

○ 구분과 경계에 의문 던지기

사실 주미의 서사를 먼저 접하며 현실의 케이팝 아이돌들을 여럿 떠올리고 그 화려한 산업 이면의 그늘을 고발하는 이야기에 몰입해 온 나와 같은 독자들은 다소 급작스럽게 등장하는 요나의 서사가 당황스러울 만하다. 나도 처음에는 별도의 두 작품이 이어 붙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아서 2부를 읽으면서도 수시로 1부를 들춰보아야 했다. 그러나 점점 넘긴 페이지가 많아질수록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혜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끔찍한 범죄에 휘말린 것인지, 디셈 오빠와 주미를 좇는 일당은 어떤 목적을 가진 것인지, 무대에서 이토록 빛나는 주미가 어째서 아이돌을 그만둔 것인지, 주미의 엄마와 아빠는 어떻게 파국을 맞은 것인지, 주미가 겪은 불행의 인과를 매끄럽게 설명하려고 쓰인 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미의 안위가 위험해지고 서사구조 상 이른바 절정에 이를수록, 이야기는 오히려 주미가 경험하는 푸른 빛과 별, 음악의 리듬과 생생한 꿈을 보여주는 데 골몰한다. 이런 서술들은 유려하고 환상적이며 때로 시적이기까지 한 문체와 만나, 주미라는 인물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주미의 시선과 꿈을 좇다 보면 비록 사건의 기승전결을 뚜렷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더라도 주미라는 인물이 얼마나 복잡한 고통 속에 놓여있으며 여러 겹의 마음을 지녔는지 만큼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1부에 해당하는 주미의 이야기를 다 읽을 즈음이면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게 된다. 고래 인간이라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은 요나에게 주미가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첫 장면에서 음악실에서의 마주침이 그토록 인상적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주미였기에, 라는 한마디만으로도 설명이 된다고.

주미는 짧은 시간 안에 가정과 사회에서 충격적인 일들을 연이어 겪어 정서적으로 취약한 청소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생을 비롯한 주변인들로부터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른다”라는 평가를 듣는 인물이기도 하다. 같은 팀 멤버들이 주미를 괴롭힌 정도가 정말 주미의 평가만큼 가혹했는지,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을 지닌 자신을 바라보는 멤버들의 고통을 좀 더 이해해 볼 수는 없었는지, 자신에게 춤을 가르쳐주며 즐거워하는 동생을 위해서 적당히 못 추는 척 넘어가는 눈치는 없었는지, 바둑판을 엎거나 연습에 불참한 일은 어찌 되었든 자신의 잘못도 있지 않은지, 순수한 선의를 갖고 다가오는 다윤과 같은 인물들에게도 지나치게 성벽을 세우고 외로워 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애초에 주미는 선하고 얌전한데 불행한 사건을 겪은 가련한 인물로 제시된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내가 주미에게 그러한 특성을 기대하며 주미를 재단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요나는 어떤가? 엄마 구희의 시선과 주미, 그리고 고래가 된 요나를 통해 맞춰지는 요나라는 존재의 퍼즐은 정말이지 간단치 않다. 한편으로는 인공과 자연, 학살과 보호라는 대립적 측면에서 우측 대변하는 영웅적 인물 같다가도, 악한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가혹한 응징을 가하는 모습을 보면 그 잔인성이 범고래에 버금가 보이기도 한다. 엄마인 구희 또한 요나를 낳을 때 본 사랍 천사의 모습이 범고래와 유사하다는 점을 진작 깨닫는다. 범고래를 부러 찾아가 살해하고 할아버지와 엄마에게 위협을 가하는 인간을 살해하는 요나의 모습은 과연 요나가 수호자인 혹등고래와 학살자인 범고래 사이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의문시하게 만드는데, 구희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인간사회에서 비롯된 인간의 마음”으로 고래인간이라는 요나의 습성을 재단하고 있다며 개입을 중단한다. 요나에게 인간 입장에서 훌륭한 고래가 되라고 말하지 않는 구희의 선택은 매우 ‘장르적’인 결말부의 전개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앞서 살펴본 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주미의 태도와도 맞닿는다. 일견 선과 악의 구도가 뚜렷한 작품으로 보이지만 실은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해, 나아가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도덕의 구분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는 작품이라는 점을 깨닫자, 소설이 취하는 주관과 객관, 현실과 환상, 진실과 거짓의 공고한 구분에 대한 질문이 구희의 태도를 통해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검푸른 고래 요나」의 독특한 스타일, 즉 서사의 시간순서나 인물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렵고 1인칭의 환상적 서술이 주를 이루거나 일의 순서가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제시되거나 어떤 인물들의 과거는 파편처럼 뜨문뜨문 주어지기도 하는 이런 식의 서술 또한 제기하려는 질문을 더욱 강화하는 형식으로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은 기존의 모범적 서사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의 사건을 밀도 있게 서술하다가도 절정에 닿는 순간 본말을 밝히는 쾌감을 주기보다는 인물의 깊은 내면으로 침잠하기를 택한다. 그래서 그 인물을 둘러싼 현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하기 어려우며, 그런 이야기들은 대체로 편지의 형식을 통해 인물의 감정과 뒤섞여 제시된다. 한마디로 ‘객관성’이라는 성질을 믿지 않겠다는 듯이, 이 세계에서만큼은 객관성이 쓴 왕관을 마음과 감정, 꿈, 신화, 구전 설화에게로 돌려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사건과 인물과 서술의 뒤죽박죽함 자체가, 이 불가해함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독서의 경험 자체가 어쩌면 흰고래의 가르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가며

죽은 줄 알았던 이들은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이들은 죽음처럼 사는 삶, 과거와 미래가 마치 띠처럼 연결된 소설 속 세계에서 죽음이라는 ‘끝’과 과거라는 규정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실 세계의 수많은 사건이 불려 나오며 이야기는 그 분량 이상의 몸집을 얻는다. 마치 미완성으로 남은 「혼불」을 통해 낡은 과거에 머물렀을 시대와 언어를 생생히 소환하고 현대사 분야를 집필하고자 했던 최명희 작가가 그러했듯, 김명주 작가 역시 「검푸른 고래 요나」 속에서 근대사와 현대사의 고통을 톺으며 긴 물줄기를 그리듯 고통의 계보학을 엮어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비록 울퉁불퉁하고 물길이 모이지 않는 지점이 생기더라도, 이성과 신화의 세계가 그러하듯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아가 그 시간에 연루되어 “그리움이 살아가는 이유”가 된 이들과 바다 아래 바다의 그리운 이들을 잊지 말자고. 세상에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고 설득시킬 수도 없지만 분명한 진실이 존재하기도 한다고 외치는 듯한 이야기는 분명 긴 시간을 들여 받을 가치가 있는 위로이자 연대의 제안이기도 했다. 세월호와 천안함, 마치 자석의 반대 극처럼 여겨지는 사건들의 본질을 물이라는 물성으로 환기하고, 사할린 강제노역과 5.18과 같은 역사적 참사를 현재의 이야기로 다시 불러낸다. 불법 포경, 포획, 고래잡이, 해양 오염과 같이 인류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도 잊지 않는다.

분명 이상하고도 덜컹거리는 이야기였으며 많은 인물의 사연이 미지로 남아 궁금하게 만드는 독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더 중요한 것을 듣고 보는 고래의 감각이 필요하다는 진실을 작품이 알려주었기에, 반복되는 일상의 퇴근길에서 누군가를 위무하려는 색소폰 소리와 발아래를 흐르는 하천을 바라보며 그리운 이들이 사는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다. 어떤 독서는 논리를 넘어서 불가해하고도 새로운 세계를 열어내는 체험의 영역일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믿게 되었다.

 

【수상소감】 과분한 결실에 감사드립니다 ∥고은별

어릴 때였습니다. 우연히 들어선 문학관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습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고 모국어는 모국의 혼이기 때문에…”

그 말이 하도 아득해 한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책장을 펼쳤지요. 『혼불』을 목도한 첫 순간이었습니다.

한두 장 읽어나 보려던 계획은 인월댁의 저미는 슬픔 앞에서 부질없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인월댁을 친정으로 돌려보내자는 문중의 의견에 청암부인은 말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소홀히 하고 있는 동안에 한 인생이 시들어 죽어간다면, 이는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부인의 결단력과 측은지심이 어린 제 마음에 망치처럼 내리꽂혔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다른 존재의 고통을 내 일처럼 여김이 가능할까요? 깨어난 인월댁에게 마음을 묶어두고 살라며 베틀을 선물하던 청암부인을 떠올립니다.

글 쓰는 일이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듯했다던 최명희 선생님의 투혼을 되새깁니다. 아프고 슬프고 가난한 이들의 삶을 모국어의 땅에 조요(照耀)히 세우기까지, 그 애정은 얼마나 아득했을지를요.

『검푸른 고래 요나』 또한 그런 마음을 보여주는 글이었습니다. 그 마음과 문장들을 읽어나가며 정신의 지문 사이를 더듬대던 와중 과분한 결실을 얻었습니다.

최명희문학관, 전주MBC, 다산북스를 비롯하여 대회를 위해 애써주신 모든 분, 무엇보다 자신의 혼을 태워 다른 혼들의 내력과 길을 밝히신 등불, 최명희 작가님과 그 길을 현재의 시공간에서 다시 이어주신 김명주 작가님께 고개 숙여 감사를 전합니다.

김미영 기자 jjtoro@nate.com

<저작권자 © 전북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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